아크테릭스 베일런스의 럭셔리 하이재킹

조용한 럭셔리의 기술적 대안. 패션 하우스로 체질 개선 중인 '아크테릭스'

아크테릭스 베일런스의 럭셔리 하이재킹
Source: Arc'teryx Veilance

"아크테릭스가 산을 위한 것이라면,
베일런스는 그 산의 기술로 만든 도시복이다."

2009년 단 15피스의 남성복으로 출발했던 아크테릭스 베일런스(Arc'teryx Veilance)의 정체성은 명확합니다. 기술을 드러내지 않고 감춘다는 의미의 ‘Veil’과 성능을 뜻하는 ‘Performance’의 결합.

Source: Arc'teryx Veilance

아크테릭스의 시그니처인 시조새 화석 로고를 철저히 지워버린 이 로고리스(Logo-less) 브랜드가 최근 글로벌 패션 비즈니스 씬에서 가장 파괴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단순히 고기능성 어반 웨어를 넘어, 더 로우나 보테가 베네타가 장악한 '조용한 럭셔리'의 기술적 대안으로까지 진화 중인 베일런스의 인사이트를 해부합니다.

Source: Arc'teryx Veilance

셀린느와 토미 힐피거의 만남

베일런스의 현재를 이해하려면 모기업인 아크테릭스의 판짜기를 먼저 봐야 합니다. 최근 아크테릭스는 최고 브랜드 책임자(CBO)로 토미 힐피거 출신의 에이베리 베이커(Avery Baker)를, EMEA 비즈니스 총괄(GM)로 셀린느(Celine) 출신의 토비아 프레베델로(Tobia Prevedello)를 영입했습니다.

미국식 대중 브랜딩의 대가와 프랑스 하이엔드 럭셔리 하우스 전문가의 조합이 뜻하는 바는 선명합니다. 아크테릭스를 단순한 '퍼포먼스 아웃도어'에서 '글로벌 럭셔리 패션 브랜드'로 포지셔닝하겠다는 야심입니다. 그리고 그 최전선이자 레이어의 정점에 베일런스가 있습니다. 베일런스 단독 GM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 벤 스터빙턴(Ben Stubbington) 체제를 독립적으로 구축한 이유 역시 패션 하우스 고유의 의사결정 속도와 감도를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Source: Arc'teryx Veilance

아웃도어를 지우는 '도시의 리듬'

베일런스가 대중과 소통하는 공간의 문법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 Summer 2025 파리 캠페인: 이들은 더 이상 거친 알프스나 캐나다의 국립공원을 조명하지 않습니다. 파리의 요리사, 직물 아티스트, 제품 디자이너 등 '도시의 크리에이터'들의 삶 속에 완전 방수·방풍 기능의 Secant SL 재킷을 스며들게 했습니다. 알피니스트가 아닌 도시 라이프스타일러를 페르소나로 삼으며 '퍼포먼스의 패션화'를 공식화한 것입니다.
Source: Arc'teryx Veilance
  • 도쿄 에디토리얼: 밴쿠버 기반의 헤드급 테크니컬 셀렉숍 '헤이븐(HAVEN)'이 베일런스의 컬렉션을 도쿄의 도심 한복판에서 촬영해 발표한 것 역시 아시아 테크니컬 패션 소비자와의 강력한 연결고리를 증명합니다. 스포츠 아웃도어 채널이 아닌, 엔드클로딩(END.)이나 슬램잼(Slam Jam) 같은 글로벌 최상위 패션 채널들이 베일런스를 모셔가는 배경입니다.

종이라는 겸허한 혁신

새 CD 벤 스터빙턴의 첫 번째 완전한 시즌인 이번 Spring 2026 컬렉션의 백미는 단연 자체 개발 신소재 'Ondritex'와 'Washiba'의 등장입니다. 베일런스는 이를 두고 "종이의 겸허한 가능성"이라 표현했습니다.

일본 전통 종이(와시, 和紙)를 연상시키는 이름의 이 소재들이 테크니컬 럭셔리 씬에서 가지는 의미는 세 가지입니다.

Source: Arc'teryx Veilance

첫째, 나일론이나 포멀 소재가 줄 수 없는 독특하고 바스락거리는 드라이한 핸드필(Hand-feel)로 미학적 차별화를 이뤄냈습니다. 둘째, 천연 식물성·재생 가능성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직관적으로 부합합니다. 셋째, 극도의 경량 구조와 미니멀한 디자인 언어를 촉각적으로 완성합니다. 브루넬로 쿠치넬리가 최고급 캐시미어로 가격을 정당화하듯, 베일런스는 고어텍스에 이은 독자적 소재 테크놀로지로 프리미엄 가격대($200~$1,800)의 당위성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Buyer’s Insight

바이어의 관점에서 베일런스는 가장 다루기 까다롭지만, 매장의 프레스티지를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는 치트키입니다. 리세일 시장에서 일부 스테디셀러가 약 -35% 수준의 방어력을 보이는 것은 럭셔리 포지셔닝으로서는 꽤나 준수한 지표입니다.

Source: Arc'teryx Veilance

로고를 쫓는 대중이 아닌, "이 가격에 이 테크가 들어갔음"을 직관적으로 알아보는 하이엔드 테크니컬 니치 마켓의 종착지입니다. 아크테릭스 메인라인보다 상위 레이어의 도시적 대안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로고를 숨기는 것이 가장 강력한 과시가 되는 시대. 아크테릭스 베일런스는 기술이 미니멀리즘과 결합했을 때 어디까지 우아해질 수 있는지 증명하고 있습니다. 셀린느 출신의 경영진과 베일에 싸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이끄는 이 조용한 테크니컬 하우스는, 어쩌면 럭셔리의 정의를 완전히 새로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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