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문화를 잇는 Institution
코펜하겐 컬렉션으로 보는 브랜드 포지셔닝과 차별화된 큐레이션 전략.
2026년 8월, 코펜하겐 패션위크(CPHFW)의 무대가 된 덴마크 국립미술관.
런웨이에 올라선 모델들은 신발을 전혀 신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대신 아제르바이잔 장인들이 양모로 직접 짠 전통 양말, '조르압(jorab)'만 신은 채 묵묵히 걸었습니다.

자극적인 쇼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 아니었습니다. 남의 집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 카프카스(Caucasus) 지역의 오래된 생활 문화를 런웨이로 가져온 것입니다. 세계적인 디자인 매체 월페이퍼(Wallpaper*) 역시 이 장면을 두고 "2026년 코펜하겐 패션위크에서 가장 눈에 띄고 강렬했던 순간"으로 꼽았습니다.
화려한 트렌드와 즉각적인 상업성에 매몰된 패션계 한복판에서, 이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조지아-아제르바이잔 출신의 디자이너 갈립 가사노프(Galib Gassanoff)가 이끄는 프로젝트, '인스티튜션(Institution)'입니다.

옷을 파는 브랜드가 아닌 '문화의 울타리'
"제 관심은 일시적인 패션 유행에 있지 않습니다. 지역 문화, 사라져가는 전통 공예,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 — 그것이 제가 가장 깊게 파고드는 주제입니다."
— Galib Gassanoff
인스티튜션은 스스로를 단순한 의류 제조업체나 패션 브랜드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잊혀가는 이야기와 소외된 지역 장인들의 기술을 하나로 모아 보호하는 '문화적 울타리' 역할을 자처합니다.
공장 생산을 거부하는 테일러링의 고집
조지아의 인구 4,000명 남짓한 작은 마을 카라잘라르(Karajalar)에서 자란 가사노프는 밀라노로 건너가 1950년대 방식의 전통 테일러링을 배웠습니다. 말꼬리 털과 캔버스를 대고 손으로 단을 떠내는 방식처럼, 빠른 공장 생산 밀려 사라진 아날로그 공정을 고집스럽게 지켜내고 있습니다.

데드스탁 원단이 만드는 한정된 희소성
인스티튜션의 모든 옷은 명문 원단 가문이 남긴 고급 데드스탁 실크, 코튼, 울, 가죽을 가져와 디자이너가 스튜디오에서 직접 손으로 자르고 만듭니다. 원단의 수량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이들의 옷은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공산품이 아니라 하나하나 가치를 지닌 '수집용 아트 피스(Collectible Object)'가 됩니다.

카펫과 신발끈: 서사로 만든 옷의 언어
인스티튜션이 글로벌 패션계에 이름을 확실히 알린 FW26 컬렉션의 핵심은 아제르바이잔 카펫 장인들과의 협업이었습니다.
가사노프는 조지아 내 아제르바이잔 소수 민족 장인들을 모아 최대 85,000개의 매듭을 일일이 손으로 묶어 만든 울 피스를 선보였습니다. 무대 위에서 카펫 자체가 유연하게 흘러내려 옷이 되는 순간, 단순한 패션을 넘어 한 민족의 삶과 노동을 증명하는 하나의 조각품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어 공개된 SS27 컬렉션 'YAD'는 아제르바이잔어로 '낯선 이(Stranger)'와 '기억(Memory)'이라는 두 가지 뜻을 함께 담아냈습니다.
- 소재의 과감한 조화: 차분한 무채색 톤 위에서 실크, 캐시미어, 모헤어 같은 부드러운 소재와 단단한 스테인리스 스틸 구조를 포개어 몸의 형태를 새롭게 재해석했습니다.
- 테일러링: 트렌디한 컬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고유의 구조와 시간을 견디는 힘에 집중하며, 쇼 무대에 올리는 룩 역시 30벌 이하로 엄격하게 제한합니다.

'자란도'와 'LVMH'가 동시에 선택한 이유
인스티튜션은 2026년 글로벌 패션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두 개의 검증대를 한 번에 통과했습니다.
- 자란도 비저너리 어워드 2026: 브랜드의 사회·예술적 접근과 지역 공동체 참여, 사라져가는 공예 기술을 보존하려는 활동을 인정받아 2026 Zalando Visionary Award를 수상했고, 이를 통해 SS27 코펜하겐 패션위크 쇼를 선보였습니다.
- LVMH 프라이즈 2026 세미파이널리스트: 세계 최고 권위의 패션 어워드에서 독보적인 '창의적 완성도'를 인정받았습니다.
흔한 패션위크 무대 대신 밀라노의 Secci Art Gallery나 덴마크 국립미술관 같은 순수 예술 공간만 골라 작품을 선보이는 이들의 고집은, 자란도가 요구한 '사회적 의미'와 LVMH가 요구한 '예술적 가치'를 완벽하게 충족시켰습니다.

장소가 곧 브랜드의 포지셔닝
인스티튜션은 이전부터 밀라노를 중심으로 컬렉션을 선보여왔지만, SS27에는 처음으로 코펜하겐 패션위크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번 참여는 2026 Zalando Visionary Award 수상에 따른 것으로, 브랜드의 크래프트맨십과 문화적 뿌리, 지속가능한 제작 방식을 국제적인 무대에서 보여주는 계기가 됐습니다.
쇼는 덴마크 국립미술관에서 열렸습니다.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전통 공예와 기억을 컬렉션의 주요 소재로 다뤄온 인스티튜션에게 미술관이라는 공간은 브랜드의 문화적·예술적 성격을 보여주기에 잘 맞는 배경이었습니다.

바이어와 리테일러를 위한 인사이트
'패션 매체 조명'에서 '진짜 팬덤 형성'으로 넘어가는 타이밍
현재 인스티튜션은 글로벌 에디터들과 어워드 심사위원들의 강한 찬사를 받으며 브랜드의 가치를 뚜렷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 타이밍에 당장 대량 오더를 추진하기보다는, 현재처럼 글로벌 어워드와 주요 패션 매체의 관심이 높아지는 시점에는, 향후 유통 확장 가능성을 살펴보며 선제적으로 브랜드와의 접점을 만들어보는 것을 권합니다.
리오더가 없는 '아카이브 작품'으로의 포지셔닝
버려지는 원단을 활용하고 디자이너가 직접 손으로 제작하는 특성상, 인스티튜션의 피스는 일반적인 도매 수주나 리오더 시스템에 맞춰 움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이엔드 편집숍에서 이 브랜드를 바잉한다면, 시즌이 지나면 할인하는 일반 의류가 아닌 '소장 가치를 지닌 희귀한 예술품'으로 공간에 큐레이션해 매장 전체의 감도와 격을 올려주는 앵커 역할로 활용해보시는 것도 좋은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