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토 데 사르노의 다음 브랜드
전 구찌 CD 사바토 데 사르노의 ICICLE 디렉터 임명 소식과 글로벌 패션 시장 시사점.
9월 7일, ICICLE은 사바토 데 사르노(Sabato De Sarno)를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했습니다. 그는 여성·남성 레디투웨어부터 액세서리와 아이웨어까지 브랜드 전반의 크리에이티브 방향을 맡으며, 첫 컬렉션은 2027-28 F/W 시즌에 공개할 예정입니다.
De Sarno가 Gucci를 떠난 것은 2025년 2월. 이후 패션의 전면에서는 비교적 조용한 시간을 보냈고, 2026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는 공예와 디자인을 다룬 전시 ‘Insieme’를 큐레이팅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복귀 무대로 택한 곳이 중국에서 출발해 파리까지 확장 중인 ICICLE이라는 점이 이번 인사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Gucci에서 ICICLE로
De Sarno는 Prada와 Dolce & Gabbana를 거쳐 2009년 Valentino에 합류했고, 이후 남녀 컬렉션을 총괄하는 패션 디렉터까지 올랐습니다. 2023년에는 Alessandro Michele의 뒤를 이어 Gucci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됐습니다.
Gucci에서는 화려하고 장식적이었던 이전 시대와 거리를 두고 보다 정제되고 미니멀한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다만 당시 Gucci의 실적은 크게 악화됐습니다. 2024년 매출은 전년 대비 23% 감소했고, De Sarno는 2025년 2월 브랜드를 떠났습니다. 물론 이를 디자인 방향 하나의 결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중국을 비롯한 럭셔리 시장의 둔화와 Gucci 자체의 브랜드 전환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Gucci에서 다소 낯설게 느껴졌던 정제된 미니멀리즘은 ICICLE에서는 오히려 기존 브랜드 언어와 가까워 보입니다.

ICICLE은 어떤 브랜드인가
ICICLE은 Ye Shouzeng과 Shawna Tao가 1997년 상하이에서 설립한 브랜드입니다. 동양 철학을 기반으로 자연 소재와 정제된 크래프트맨십, 차분한 현대적 디자인을 결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브랜드는 이를 ‘Made in Earth’라는 철학으로 설명해왔습니다.
규모도 이미 작지 않습니다. 현재 20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파리에도 부티크를 두고 있습니다. 2025년 글로벌 매출은 €3억을 넘어선 것으로 보도됐고, 최근 몇 년간 두 자릿수 성장세도 이어졌습니다. 2018년에는 프랑스 브랜드 Carven을 인수해 현재 두 브랜드 모두 ICCF 그룹 아래에 있습니다.
ICICLE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생산 구조입니다. 약 90%의 제품을 자체 시설에서 생산하는 수직 통합형 공급망을 운영하고 있으며, 파리와 상하이를 오가는 크리에이티브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디자인뿐 아니라 소재와 생산까지 직접 관여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Kering 투자 5개월 뒤, De Sarno의 합류
이번 인사를 더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Kering과의 연결입니다.
Kering은 지난 4월 ICICLE의 모회사 ICCF에 소수 지분을 투자했습니다. 그룹은 이번 투자를 통해 ICICLE의 국제 확장과 새로운 제품 카테고리 개발을 지원한다고 밝혔습니다. Kering의 중국 시장 이해와 ICCF의 현지 기반, Kering이 가진 유럽의 브랜드 운영·크래프트맨십 경험을 결합한다는 계획입니다. 그리고 약 5개월 뒤, 과거 Kering의 최대 브랜드 Gucci를 이끌었던 De Sarno가 ICICLE에 합류했습니다.
두 결정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Kering이 글로벌 확장을 지원하기 시작한 중국 브랜드에 전 Gucci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합류했다는 흐름은 ICICLE이 앞으로 국제 시장에서 브랜드의 무게를 키우려 한다는 방향과 맞닿아 있습니다. Vogue 역시 이번 인사가 De Sarno와 Kering의 연결을 제한적으로나마 다시 만든다고 평가했습니다.

왜 ICICLE인가
De Sarno 자신도 이번 선택의 이유를 브랜드 철학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완성된 제품뿐 아니라 원재료의 기원과 그것을 형태로 만드는 크래프트맨십에 관심을 가져왔다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하는 ICICLE의 원칙과 자신의 창작 철학 사이에서 강한 공통점을 느꼈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Gucci 시절과의 흥미로운 대비가 생깁니다. De Sarno가 Gucci에서 보여준 정제되고 절제된 디자인이 당시 하우스의 기존 이미지와 충분한 상업적 반응을 만들지 못했다면, ICICLE은 애초부터 자연 소재·미니멀리즘·조용한 현대성을 브랜드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이동은 De Sarno의 디자인 언어 자체가 크게 달라진다기보다 그 언어와 더 가까운 브랜드를 만난 것인지를 지켜보는 편이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중국 브랜드에서 글로벌 브랜드로
ICICLE의 과제도 분명합니다. 이미 중국에서는 상당한 규모를 갖췄지만 글로벌 확장은 아직 진행 단계입니다. 공식 파리 패션위크 캘린더에 진입했고 파리 매장을 운영하는 한편, Kering의 투자 역시 국제 확장과 새로운 카테고리 개발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ICCF의 IPO 가능성도 보도됐으며 일부 투자자들은 그룹 가치를 약 €10억 수준으로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다만 IPO는 아직 검토 단계입니다.
Kering 투자 → 전 Gucci CD 영입 → 2027-28 F/W 첫 컬렉션.
이 흐름을 보면 ICICLE은 단순히 중국에서 잘 팔리는 로컬 브랜드를 넘어, 국제적인 럭셔리·컨템포러리 시장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설정하려는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EDITORIAL SMALL TALK
이번 인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질문은 “왜 전 Gucci 디렉터가 중국 브랜드로 갔을까?”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대형 유럽 하우스를 떠난 디자이너의 다음 행선지로 또 다른 파리·밀라노 하우스를 예상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하지만 ICICLE은 이미 중국에서 규모를 만들었고, Carven을 보유하고 있으며, Kering의 투자까지 받았습니다. 여기에 De Sarno까지 합류했습니다. 이번 이동은 디자이너의 선택지가 넓어진 것뿐 아니라 글로벌 패션에서 ‘중심’이라고 부르는 장소 자체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로도 읽어볼 수 있습니다.